16 – 정부지원금
"모험은 저 바깥에 있어!"
— 영화 《업(UP)》 중에서
"Adventure is out there!"
받지 마라.
내가 초기 창업가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조언 중 하나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쉬운 돈의 꼬리표
많은 창업가들이 쉽게 올리는 매출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국가에서 주는 돈에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국민의 세금으로 쓰는 돈이기에 높은 책임과 공정성,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만큼 창업가의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런데도 많은 창업가들이 회사가 추구하는 본질과 거리가 먼 국책 과제를 맡는다거나, 쉬운 매출이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정부 지원 사업에 지원하느라 자신과 회사의 자원을 낭비한다. 가슴에 다시 물어보자.
"과연 그것이 내가 창업할 때 꿈꿨던 그것인가?"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당장 거절해야 한다. 거절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매몰 비용 — 숫자로 보자
2024년 기준 국내 주요 정부 창업 지원 사업(중소벤처기업부 창업진흥원의 예비창업패키지·초기창업패키지·TIPS 등)은 연간 수조 원 규모로 집행된다.1 그중 상당수는 선정 후 6개월–1년에 걸친 보고서 작성, 분기별 이행 점검, 집행 증빙 준비가 의무화되어 있다. 중소 스타트업 기준으로 이 행정 비용은 월간 2–5일의 대표 시간에 해당한다는 현장 조사 결과도 나온다.
즉 "1억 원을 지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1억 원 - (연간 50~60일의 대표 시간) - (대표의 집중력 분산) - (제품 로드맵의 방향 조정)"이다. 뺄셈을 해보면 실제로 남는 금액이 그리 크지 않다.
기회비용의 함정 — 두 창업가 이야기
두 스타트업 A와 B가 비슷한 시기에 창업했다고 하자. 둘 다 푸드테크(foodtech) 분야이고, 월 번레이트 2,000만 원 수준의 5인 팀이다.
- A사: 정부 R&D 과제 공모에 선정되어 3억 원을 확보했다. 대신 분기별 중간보고서·최종보고서·집행 증빙·현장 실사·연구 노트 관리 등 대표의 시간 중 약 30%가 행정에 할당된다. 18개월이 지난 뒤, A사는 지원 과제 제안서에 적었던 '소비자 식단 빅데이터 분석' 방향으로 묶여 있고, 그 사이 시장이 원한 '1인가구 밀키트 구독' 방향으로는 피봇하지 못했다.
- B사: 같은 시기 같은 돈 3억 원을 시드 VC와 엔젤로부터 유치했다. 대신 투자자들은 분기마다 방향을 묻고 도와주었다. 18개월 뒤 B사는 시장 반응에 따라 세 번 피봇했고, 초기 구독자 1만 명을 확보했다.
같은 3억 원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A사에게 남은 건 과제 결과물과 행정 부담, B사에게 남은 건 제품·시장 적합성과 다음 라운드 기회였다. (방향 전환과 피봇의 기술은 5장 〈변화의 기술〉)
정부 지원금을 검토할 때 체크할 것
- 이 과제의 목적이 우리 회사의 본질적 미션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 선정 후 요구되는 보고·증빙의 시간 비용을 정확히 계산했는가? (보통 금액의 10~15%에 해당)
- 이 지원금이 없어도 같은 일을 할 것인가? ("있어서 이걸 한다"는 답이 나오면 거절이 맞다)
- 매칭 펀드(matching fund)가 요구되지는 않는가? (요구되면 회사 자본도 함께 묶인다)
- 지원 기간 종료 후 지식재산권(IP)의 귀속은 어떻게 되는가?
예외 —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
물론 정부 지원이 본질적으로 필요한 분야도 있다. 바이오·반도체·우주 같은 초기 개발 비용이 막대한 산업, 또는 공공 인프라(의료·교육·사회 복지)와 직접 연결된 사업이 그렇다. 이 경우에는 정부 지원이 필수 자본이며, 행정 비용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같은 맥락의 '목적 지향 자금 조달' 관점은 6장 〈왜 투자받는가〉)
TIPS — VC와 정부 자금이 섞인 사례
민간 자금과 정부 자금의 경계에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TIPS(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 Korea)는 지정된 민간 운영사(VC·액셀러레이터)가 먼저 시드 투자를 집행하면 정부가 최대 5억 원의 R&D 매칭 자금을 추가로 집행하는 방식이다.2 2013년 시작된 이래 수천 개 스타트업이 거쳐 갔고, TIPS 프로그램을 거친 한국 스타트업 중 유니콘·예비 유니콘급으로 성장한 사례도 다수 있다. 이 경우는 "일반적인 정부 지원금"과 다르다 — 민간 VC의 투자 판단이 먼저 들어간 뒤 매칭 자금이 붙기 때문에, 일반 국책 과제와 달리 보고·증빙 부담이 덜하고 사업 방향 간섭도 적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도 전제는 같다. 지원금이 본질적 미션과 일치할 때만 받아야 한다. '일단 받고 보자'는 태도는 창업가의 시간을 가장 빠르게 태우는 길이다.
다음은 — 시간이라는 자원
돈의 크기보다 시간의 크기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투자 유치와 관련해 시간을 어떻게 무기로 삼을지를 다룬다. (6장 〈시간은 가장 강력한 무기〉)
참고 문헌
[1] "창업진흥원", Wikipedia (한국어). https://ko.wikipedia.org/wiki/창업진흥원
[2] "TIPS (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 Korea)", 중소벤처기업부 안내. https://www.joint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