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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피칭 — 15초, 30초, 3분

"투자자의 관심은 1분 안에 사거나 잃는다."

— 가이 가와사키(Guy Kawasaki), 애플(Apple) 전 에반젤리스트 · 《당신의 기업을 시작하라》

스피드 데이트에서 투자자 되기

투자 유치 단계에 들어서면 창업가는 수십 명, 때로는 100명에 가까운 투자자에게 같은 사업을 반복해 설명한다. 듣는 쪽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투자자는 하루에 사진 앱·반도체·바이오·게임까지 전혀 다른 사업을 쉴 새 없이 듣는다. 첫 문장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면, 그다음 문장은 없다.

나는 가장 기억에 남는 피칭을 사무실이 아닌 엘리베이터에서 들었다. 30초 만에 시장의 문제와 해결 방식이 또렷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에 "다음 주에 제대로 뵙죠"라는 약속이 오갔다. 피칭 스킬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얘기를 세 가지 길이로 반복해 연습해둔 사람이었다.

세 가지 길이를 연습하라

상대방과 허용된 시간에 따라 다른 길이의 피칭이 필요하다. 최소 세 가지는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 15초 — 엘리베이터 피칭. 복도·엘리베이터·네트워킹 리셉션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우리는 OO 시장의 OO 문제를 OO 방식으로 푸는 회사입니다." 단 한 문장. 투자자가 다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 30초 — 짧은 첫 미팅. 투자자가 시간에 쫓길 때, 또는 데모데이(Demo Day)의 1분 스피치 구간. 문제·해결·시장 크기·팀을 각 한 문장씩. 숫자는 한두 개만.
  • 3분 — 투심 전 심사역 단독 미팅. 슬라이드 없이 대화로. 문제의 디테일, 우리가 왜 이 문제에 꽂혔는지, 지금까지 무엇을 실험했는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이 길이를 넘어서면 질문 없는 일방적 발표가 된다.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의 데모데이는 이 원칙을 가장 극단적으로 압축한다. 2024년 여름 기수 데모데이의 각 스타트업 발표 시간은 단 1분이었다.1 1분 안에 "우리가 푸는 문제가 왜 큰가"를 증명해내지 못하면, 다음 미팅은 오지 않는다.

제품·기술보다 시장의 문제와 크기부터

대부분의 창업가는 첫 만남에서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나 기술의 우수성부터 설명한다. 하지만 명심하자. 투자자의 책상에는 당신의 제품보다 훌륭한 제품 설명이 이미 쌓여 있다. 우리 기술이 세계 최고일 가능성은 낮고, 설령 그렇다 해도 투자자는 그것을 당신 말만으로 믿지 않는다.

투자자의 관심을 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창적 시각으로 시장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다.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가 넷플릭스(Netflix)를 창업하고 투자자를 만날 때, 그는 VHS 대여 시장의 규모가 아니라 "연체료가 없는 시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기존 오프라인 비디오 대여점의 문제가 무엇이고, 인터넷이 이를 어떻게 해결하며, 그 시장이 어디로 가는지. 시장을 다른 창업가와 다르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왜 우리 팀이 그 문제를 가장 잘 풀 수 있는지다. 스펙이나 인맥 자랑이 아니라, 우리가 왜 이 문제에 빠졌고, 얼마나 오래 집착했으며,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웹툰을 모바일로 서비스한 레진코믹스(Lezhin Comics)의 창업자는 만화방 주인의 아들이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웹툰 사업을 연구하던 만화 덕후였다. 이런 서사가 기술 스펙보다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나는 구글 캠퍼스 서울 시절 매달 데모데이에서 수십 건의 피칭을 봤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배달의민족(Woowa Brothers) 김봉진 대표의 초기 피칭이었다. 그는 시장 통계나 TAM/SAM/SOM 차트로 시작하지 않았다. "강남 골목에서 제가 주운 전단지가 몇 장인지 아세요?"로 시작했다. 그 한 문장 뒤에 투자자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시장 문제를 창업가의 직접 경험으로 설명하는 힘 — 숫자보다 강한 피칭이 이런 것이다. (같은 일화는 6장 〈잘나가는 회사소개서〉에서도 등장한다.)

투자자 눈높이에 맞춰라

벤처캐피탈은 여러 창업가를 만나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 전문가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에도 패션 쇼핑몰·모바일 데이팅·미세먼지 제거 기술·자율주행차 창업가를 연이어 만나지만, 어느 한 분야에 깊은 전문성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994년 제프 베조스(Jeff Bezos)가 아마존(Amazon)을 창업하고 투자자를 만나러 다닐 때, 그는 대부분 "인터넷이 무엇인가"부터 설명해야 했다.2

피칭의 깊이는 듣는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 상대가 어느 단계에 투자하는지, 과거에 어떤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지 미리 공부해두자.

  • 시드 단계 투자자는 시장과 팀에 관심이 있다. 제품·트랙션보다 "왜 지금, 왜 당신들이냐"에 집중한다.
  • 시리즈 A 투자자는 트랙션을 본다. 초기 고객·리텐션·고객 획득 비용(CAC).
  • 시리즈 B 이상은 유닛 이코노믹스와 스케일업 가능성에 집중한다. LTV/CAC, 매출 원가율, 지역 확장.

같은 사업이라도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피칭이 나와야 한다.

투자자를 공부하라

"나의 후손의 전 재산을 좌우하게 될 사람들과 마주 앉을 때는, 그들의 어머니보다 더 상대를 잘 알아야 한다."

창업가 출신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Antonio García Martínez)가 실리콘밸리의 민낯을 고발한 《카오스 멍키(Chaos Monkeys)》의 한 구절이다.3 상대의 어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투자자가 어떤 펀드를 운용하는지, 과거에 어떤 스타트업에 투자했는지, 펀드의 남은 수명은 얼마인지 — 이런 기본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특히 펀드의 남은 수명이 중요하다. 10년짜리 펀드라면 보통 첫 4년 동안 투자하고 나머지는 회수 기간이다. 펀드 결성일로부터 4년이 지난 투자자라면, 곧 회수 압박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 6장 〈좋은 투자자를 알아보는 법〉 § 펀드 만기일을 반드시 확인하라)

돌발 상황에 대비하라

투자자와 미팅을 하다 보면 준비한 영상이 재생되지 않거나, 프로젝터가 먹통이 되거나, 예상치 못한 질문이 쏟아지는 상황이 빈번하다. 영상은 애초에 큰 자리에서는 켜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 데모데이나 경쟁 발표에서 영상을 상영하는 것은 기술적 실패 확률이 높고, 관심은 창업가가 아니라 화면으로 가버린다.

한 번은 발표 시간 5분 중 3분을 영상 시청에 할애한 창업가를 본 적이 있다. 심사위원들은 더 이상 발표자에게 질문하지 않았고,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투자자들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에서, 굳이 따로 볼 수 있는 영상을 틀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모르는 질문이 나왔다면 솔직히 모른다고 답해도 된다. 투자자는 창업가가 모든 정답을 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창업가가 문제를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있고, 모르는 것을 어떻게 해결해가는 자세를 가졌는지를 본다. 억지로 꾸며낸 답변이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나면 신뢰는 복구가 안 된다.

피칭 전 체크리스트

  • 15초/30초/3분 버전을 각각 소리 내어 두 번씩 연습했는가?
  • 첫 문장이 "문제"로 시작하는가, "우리 제품"으로 시작하는가?
  • 오늘 만날 투자자의 최근 포트폴리오 5개를 말할 수 있는가?
  • 이 펀드의 남은 수명은 몇 년인가?
  • 미팅 중 예상되는 가장 어려운 질문 5개와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는가?
  • 영상·프로젝터·링크가 실패했을 때의 백업 플랜이 있는가?
  • 모르는 질문이 나왔을 때 "모릅니다. 확인 후 회신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다음은 — 투자자 고르기

피칭은 투자자의 관심을 끄는 기술이다. 관심이 생기고 나면, 이번엔 창업가가 투자자를 평가할 차례다. 돈을 주는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은 아니다. (☞ 6장 〈좋은 투자자를 알아보는 법〉)

참고 문헌

[1] "Y Combinator Demo Day",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Y_Combinator

[2] "History of Amazon",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Amazon

[3] Antonio García Martínez, Chaos Monkeys: Obscene Fortune and Random Failure in Silicon Valley. Harper, 2016. https://www.goodreads.com/book/show/26195279-chaos-monke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