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언제 투자받는가?
"돈을 모을 수 있을 때 모아라. 필요할 때가 아니라."
— 제이슨 칼라카니스(Jason Calacanis), 《엔젤(Angel)》 중에서
"Raise money when you can, not when you have to."
투자는 언제 받는가? 정답은 '성장할 때'다. 생존하려고 받으면 망한다. 투자자는 회사를 살려주려는 은행이 아니다. 성장을 폭발적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주는 사람이다.
스타트업의 네 가지 성장 단계
스타트업은 대체로 네 단계의 성장 곡선을 거친다. 각 단계마다 돈의 성격이 달라진다.
① 창업 단계(Bootstrap stage)
아이디어가 있고 팀이 막 구성된 시기다. 제품은 아직 없거나 초기 프로토타입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자금은 적은 편이지만 대부분의 창업가는 '자기 돈' 또는 친구·가족(FFF, Friends-Family-Fools) 자금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벤처캐피탈 투자보다 빠른 가설 검증이 훨씬 중요하다. 돈을 쓸 곳이 없기 때문이다.
② 검증 단계(Validating stage)
문제와 해결책이 확인되면, 제품을 만들고 시장을 시험해야 한다. 최소 기능 제품(MVP, Minimum Viable Product)을 빨리 내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제품·시장 적합성(Product-Market Fit)을 확인한다. 에릭 리스(Eric Ries)의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모델을 도입하거나 그에 준하는 방법으로 MVP를 개발하고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적합한 시장·제품을 찾아가는 시기다.1
이 시기에는 벤처캐피탈로부터 여러 번 투자를 받아 필요한 자금과 전략적 파트너를 확보한다. 투자 단계에 따라 시드(Seed), Pre-Series A, Series A, Series B 등으로 구분한다. 보통 이 시기에는 충분한 매출이 나지 않기 때문에 번레이트(burn rate)를 최소로 하고 현금과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번레이트의 정의는 6장 〈왜 투자받는가〉)
③ 성장 단계(Growth stage)
시장에서 먹히는 제품을 확보했다면 최대한 빨리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매출과 이익을 늘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보통 이 시기에 적자를 탈출해 흑자 전환하고 기업가치가 J커브로 올라간다. 때로는 더 큰 성장을 위해 적자를 감수하면서 인프라나 연구·개발, 마케팅에 과감히 투자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후기 투자자(late-stage venture capital)나 사모펀드(PE)에서 투자를 받는다. 초기에 투자했던 엔젤 투자자나 초기 벤처캐피탈들은 이 시기에 지분을 팔고 이익을 실현하기도 한다(세컨더리(secondary) 매각).
④ 기업공개(IPO)
회사가 충분히 커졌다면 공개 시장에 주식을 상장시키면서 자금을 모을 수 있다. 때로는 창업가의 개인적 의지와 무관하게 기업공개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과의 경쟁 이슈가 불거지거나,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경우, 또는 투자자들이 창업가에게 상장을 요구하는 경우가 그렇다. 기업공개를 하면 더 많은 규제를 따라야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자금 모집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벤처캐피탈의 투자 단계
벤처캐피탈들도 스타트업의 각 단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투자한다.
시드(Seed) 단계
창업 초기, 제품이 없거나 초기 단계일 때 진행한다. 투자 계약은 전통적으로 보통주로 많이 했지만, 최근에는 SAFE(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 같은 주식 전환 조건의 간단 계약을 쓰는 경우가 늘었다.2 이때는 재무제표 기반 기업가치 평가가 의미가 없으므로 해당 시장의 규모·트렌드, 팀의 역량 등을 근거로 투자자와 협상해 기업가치를 정한다. 2024년 한국 시드 라운드는 5–50억 원 규모가 일반적이며, 미국 시드는 USD 1–5M(약 13–65억 원) 수준이 시장 표준에 가깝다.
SAFE(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란?
컨버터블 노트(convertible note) 형태를 간소화한 초기 투자 계약서다. 컨버터블 노트는 우선 투자하고 추후 가치평가가 정해질 때 주식으로 전환하는 오픈형 전환사채다. SAFE는 그 복잡성을 대폭 줄여 창업가와 엔젤이 단시간에 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가 2013년에 공개했으며, 이후 전 세계 시드 계약의 표준 중 하나가 되었다.3
유사한 양식으로 500 글로벌의 KISS(Keep It Simple Security)도 있다.
시리즈 A와 이후
제품·시장 적합성이 보이면 본격적으로 벤처캐피탈이 수억~수십억 원을 넣는다. 이때부터는 우선주(preferred stock)로 투자가 진행된다. 매출, 사용자 지표, 성장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기업가치 평가와 투자 전 실사(due diligence)가 제법 높은 수준으로 진행된다. 투자회사마다 다르지만, 협상부터 실제 투자금 납입까지는 몇 주에서 몇 달씩 걸린다.
그렇다면 언제 나서야 하나
성장 곡선의 다음 단계를 준비했을 때다. 시드에서 시리즈 A로 넘어간다면 "우리 제품은 고객 충성도를 확보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투자자는 단순히 "사용자가 몇 명인가요?"를 묻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투자자는 "유저 트랙션(user traction)이 어때요?"를 묻는데, 이는 단순한 고객 숫자를 넘어 구매 전환율, 재구매율, 잔존율 등 충성도 지표가 궁금하다는 의미다. (유저 행동 데이터 분석 방법은 5장 〈설문조사〉)
엔젤 투자자에게는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 시드 단계에서 엔젤에게 피칭하는 경우에는 "우리 팀이 왜 이 시장의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는가"를 설득하는 것이 핵심이다. 숫자보다 스토리와 팀이 먼저다.
돈 떨어진 뒤에 시작하면 늦다
투자 유치는 보통 3~6개월 걸린다. 돈이 다 떨어지고 나서 시작하면 늦다. 막상 돈이 떨어져서 투자를 급하게 구하다 보면 조건이 나쁜 투자자, 혹은 사기꾼과 거래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창업가들에게 현금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보다 1년 전부터 투자 유치를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여유를 가지고 전략적인 투자 유치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투자자의 돈을 받으려면 지금 당장 돈이 필요없을 때 투자 유치해야 한다. 급한 상황에서 돈을 구하면 나쁜 돈이 찾아온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벤처캐피탈은 '성장'하라고 돈을 준 것이지 '생존'하라고 준 게 아니다. 단순히 회사에 돈이 떨어져서, 운영 자금이 필요해서, 생산 자금이 필요해서 투자를 받으려 든다면 의미 있는 자금을 유치하기 어렵다. 운영 자금이 필요하다면 대출이나 정책자금 같은 다른 성격의 돈을 찾는 편이 훨씬 낫다. (6장 〈정부지원금〉)
창업가 체크리스트 — 지금 투자받아야 하는가?
- 왜 지금 투자받아야 하는가? (6개월 뒤가 아니라)
- 우리 회사는 현재 어느 성장 단계에 있는가?
- 6개월·1년 뒤 우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 이번 라운드 이후의 투자 전략(시리즈 A/B/C 로드맵)은 무엇인가?
- 현재 런웨이(runway, 남은 현금으로 운영 가능한 기간)는 몇 개월인가?
투자자의 체크리스트 — 지금 투자해야 하는가?
- 지금 꼭 투자해야 하는가? 아니면 6개월 후 검토해도 되는가?
- 이번 투자 이후 다음 라운드는 언제쯤 진행될 것인가?
- 핵심 지표(트랙션·유닛 이코노믹스)가 성장 곡선을 그릴 만큼 충분히 나오는가?
- 이 팀이 6~12개월 안에 다음 마일스톤을 달성할 수 있는가?
- 경쟁 구도상 지금 이 회사에 투자해야 할 시점인가?
다음은 '얼마나'
언제를 정했다면 다음 질문은 얼마를 받을 것인가다. 너무 적게 받으면 다음 라운드가 빨리 돌아오고, 너무 많이 받으면 지분이 많이 희석된다.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추는지가 다음 장의 주제다. (6장 〈얼마나 투자받는가〉)
참고 문헌
[1] Eric Ries, The Lean Startup. Crown Business, 2011.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0127019-the-lean-startup
[2] "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Simple_agreement_for_future_equity
[3] "Y Combinator",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Y_Combina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