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 자존감
"자랑하긴 싫지만, 나는 이 행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식물학자라고."
— 마크 와트니(Mark Watney), 영화 《마션(The Martian)》 중에서
"I don't want to come off as arrogant here, but I'm the best botanist on the planet."
창업가에게 자존심은 사치다. 대기업 명함을 내려놓자마자 세상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평범한 회사원일 때는 누구나 당신에게 친절하다. 은행은 대출을 쉽게 내주고, 자동차 할부도 걱정 없다. 하지만, 창업을 시작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VIP' 리스트에서 사라진다.
나는 처음 창업했을 때, 그 변화가 그렇게 극적일 줄 몰랐다. 만기를 앞둔 신용카드를 갱신하려고 신청서를 냈는데, 이유 없이 거절당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간 수천만 원 한도까지 쓰던 카드였다. 월급이 끊기고, 소득증빙이 어려워지니 바로 태도가 달라졌다.
이 모든 순간이 당신의 '자존심'을 긁는다. 창업가가 된다는 건, 사회의 안전망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다. 남들이 대접해주던 그 모든 특권이 단 하루 만에 사라진다.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
세이브앤코(Save&Co) 창업자 박지원 대표는 유명 디자인스쿨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텍사스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여성들의 건강에 가치를 둔 섹슈얼 웰니스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와서 세이브앤코를 창업했다. 첫 번째 제품은 여성 건강에 해로운 화학성분을 모두 뺀 콘돔이었고, 여성들이 파우치에 넣고 다니기 편한 패키지 디자인으로 여성 구매자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어느 대형 유통채널 담당자와 제품 판매 미팅에 갔다가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구매상담실은 마치 큰 박람회 간이부스가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산만했고, 담당자는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했다. 박지원 대표는 홈쇼핑 진출 계획을 포기하고, 오프라인 편집숍과 온라인 채널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오히려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하자, 여성 고객에게 더 빠르고 진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자존심을 세울 곳이 아니라, 버릴 순간이었다. 방향을 바꾼 뒤, 세이브앤코는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라 블레이클리(Sara Blakely)도 비슷했다. 스팽크스(Spanx)를 창업하기 전, 그녀는 팩스 기계를 집집마다 방문 판매하는 영업사원이었다. 문전박대는 일상이었다. 2000년 스팽크스를 들고 나왔을 때도, 백화점 바이어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본사를 찾아가 화장실에서 제품을 시연했다. 그 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가 "올해 최고의 제품" 리스트에 스팽크스를 올리면서 반전이 왔다. 2021년 블랙스톤(Blackstone)은 스팽크스에 12억 달러를 투자하며 기업가치를 약 12억 달러로 평가했다.1
창업가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다. 자존심은 타인이 만들어주는 허상이고, 자존감은 스스로 쌓아 올리는 단단한 기반이다. 자존심을 세우는 데 에너지를 쏟을수록, 사업은 멀어진다. 자존감이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의미 부여'와 미션에 대한 자기 믿음이다. 그 자존감이 실패의 중력장에서 당신을 건져올린다. (실패중력장 개념은 4장 〈실패중력장〉에서 처음 다뤘다. 거절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4장 〈거절〉에서 이어진다.)
참고 문헌
[1] "Spanx",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Span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