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혁신은 비용이 한계점으로 수렴할 때 일어난다
"미래를 예측하는 우리의 직관은 선형적이다. 하지만 정보기술의 현실은 지수함수다. 이는 매우 심오한 차이다. 선형함수의 세계에서는 내가 30보를 걸으면 30보를 가지만, 지수함수의 세계에서 30보는 10억 보와 같다."
—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미래학자
"Our intuition about the future is linear. But the reality of information technology is exponential, and that makes a profound difference. If I take 30 steps linearly, I get to 30. If I take 30 steps exponentially, I get to a billion."
인류 역사를 보면 급격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는 시점은 거의 비슷하다. 우연한 발견이나 기술의 발전으로 어떤 자원의 생산비용이 거의 0으로 수렴하는 순간 세상은 바뀐다. 기존 권력은 붕괴하고, 기회는 혁명가에게 온다.
지식의 전달비용이 0이 된 순간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한 후 50년 동안 인쇄된 책의 수는 이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만든 책보다 많다.1 과거에는 주로 수도승들이 직접 손으로 쓰는 필사의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성경 한 권을 필사하는 데에만 수년이 걸렸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아주 쉽게 성경책을 찍어냈고, 저렴해진 성경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서를 필사하던 시절엔 가톨릭 기준 총 73권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 때문에 성경 한 질의 값이 무려 집 10채 값에 해당했으므로 일반인들이 성서를 소유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교회는 이러한 지식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런 '독점'은 교회가 교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성경을 접한 사람들이 기존의 교리해석을 반박하고 체제를 비판하기 용이해지면서 기존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개혁(Reformation)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급기야 18세기 들어 유럽 전역에 인권에 대한 사상이 퍼지면서 인권선언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15~18세기에 벌어진 급진적인 사상의 변화는 책을 찍어내는 비용을 집 몇 채 가격에서 불과 빵 몇 조각 정도의 비용으로 급격히 떨어뜨린 '기술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노동비용이 0으로 수렴했을 때
1750년대 영국,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석탄광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 증기기관을 발명한 이후, 이 '땀 흘리지 않는 엔진'은 곧 세상의 노동개념을 바꿔버렸다.2 사람이 실을 잣던 방적공장에 증기기관이 들어오자 생산량이 수십 배로 늘어났다. 직조공 한 명이 하루 종일 짜던 천을, 이제는 기계 한 대가 단시간에 끝냈다. 같은 값이면 더 빠르게, 같은 시간이라면 더 싸게.
이는 곧 모든 농기계와 제조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노동은 더 이상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기계가 움직이는 한, 공장은 24시간 돌아갔다.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이 몰렸고, 수공업자는 밀려났다. 자본가와 기계가 만든 공장 시스템이 세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으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노동비용을 0에 가깝게 만들었다.
음악의 유통비용이 0이 된 순간
2000년 션 패닝(Shawn Fanning)이라는 젊은이가 '냅스터(Napster)'라는 서비스를 만들어 개인이 갖고 있는 음악파일(MP3)을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거의 공짜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한편에서는 이 서비스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음반사들을 주축으로 엄청난 소송전이 벌어졌다. 결국 2년 뒤 소송에서 진 패닝은 냅스터를 중단해야 했지만,3 그가 풀어놓은 '공유'라는 개념은 다시는 음악산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음반사들은 누구나 인터넷에서 공짜로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아티스트들은 돈을 못 벌게 되고, 더 이상 좋은 음악을 만들지 못할 거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휴대폰과 스트리밍을 통해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더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K-POP은 기회를 잡았다. 과거엔 한국 가수가 미국 시장에 진입하려면, 현지 음반사와 계약하고 라디오 방송을 타고 미국 투어까지 해야 했다.
이제는 다르다. 뮤직비디오 한 편이면 전 세계를 흔든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BLACKPINK), 뉴진스(NewJeans)는 '미국 진출'이 아니라 글로벌 플랫폼 위에서 탄생했다. 과거엔 음악의 질보다 유통의 힘이 컸다. 지금은 유통이 평평해졌고, 콘텐츠가 실력을 증명한다. 음악의 유통비용이 0이 되자, 가장 멀리 있었던 한국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유전자 시퀀싱 비용이 0에 가까워진 순간
2003년, 인류 최초로 인간 유전자의 염기배열 전체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인류적 과학발견에는 수천 명의 과학자들과 13년의 세월, 그리고 약 27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갔다.4 그로부터 20년 뒤, 미국 NIH 산하 NHGRI는 전장유전체분석(Whole Genome Sequencing) 비용이 약 600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2022년 일루미나(Illumina) 경쟁사인 울티마 지노믹스(Ultima Genomics)는 100달러 시퀀싱을 공언했고, 2024년 일루미나는 임상 등급 200달러 이하 시퀀싱 플랫폼을 출시했다.5
진정한 도전은 이제 '읽는' 비용이 아니라 '해석하는' 능력이다. 한국계 미국 스타트업 이노크라스(Inocras)의 공동창업자 이정석 박사(의사-과학자)와 주영석 박사(유전체학자)는 "유전체 정보를 모두에게 열어 암과 희귀질환 진단을 민주화하자"는 비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전장유전체분석 기반의 희귀질환 진단 플랫폼 RareVision과 암 정밀진단 플랫폼 CancerVision을 개발했다. 기존 유전자 패널로는 놓치기 쉬운 수천 개의 유전자를 분석해, 조기 유방암 환자에게서 변이를 감지하고 맞춤형 모니터링과 예방치료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6
유전자 정보의 분석비용이 0에 가까워지자, 기존에는 돈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정밀진단의 문이 열렸다.
머신러닝의 비용이 0이 된 순간
2017년 구글 넥스트(Google Next) 컨퍼런스에서 페이페이 리(Fei-Fei Li) 박사는 "머신러닝을 민주화하겠다"라고 말했다. 마치 구텐베르크가 값싼 인쇄술을 보급함으로써 인류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정보를 민주화한 것처럼, 이제 머신러닝도 소수의 박사들이 연구하는 기술이 아니라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이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7
그 후 8년 만에 비용곡선은 다시 한 번 무너졌다. 2022년 말 오픈AI(OpenAI)가 챗GPT(ChatGPT)를 공개하면서 자연어 생성 비용은 한 해 만에 100분의 1로 떨어졌고,8 2024년부터는 메타(Meta)의 라마(Llama), 구글(Google)의 젬마(Gemma), 알리바바(Alibaba)의 큐원(Qwen) 같은 오픈 모델 가중치가 공개되면서 누구든 노트북에서 모델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연구원들은 '연구비 수십 억' 제안서를 쓰는 대신, '깃허브 클론'과 '허깅페이스 다운로드'로 시작한다.
비용이 0이 되는 순간, 독점은 무너지고 권력은 바뀐다. 그리고 스타트업에게 기회가 생긴다. 당신이 주목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어떤 비용이 0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다음 10년의 시장이다. (비용 곡선의 변곡점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자세는 2장 〈원대한 아이디어보다 하찮은 실행이 낫다〉에서 다뤘다. 그 변곡점이 만들어내는 광풍과 가짜 실력자 문제는 3장 〈태풍이 불면 돼지도 난다〉에서 이어진다.)
참고 문헌
[1] "인쇄술의 역사 (History of printing)",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printing
[2] "제임스 와트 (James Wat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Watt
[3] "냅스터 (Napster)",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Napster
[4] "Human Genome Project FAQ", National Human Genome Research Institute (NHGRI). https://www.genome.gov/human-genome-project/Completion-FAQ
[5] "Illumina Unveils Revolutionary NovaSeq X Series to Rapidly Accelerate Genomic Discoveries." Illumina Press Release, September 29, 2022. https://www.illumina.com/company/news-center/press-releases/press-release-details.html?newsid=64720458-2cdc-4b89-9af1-bbe6e2716eaa
[6] "About Inocras", Inocras. https://inocras.com/about/
[7] "Fei-Fei Li",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Fei-Fei_Li
[8] "ChatGP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atGPT